● 아이폰과 EUV 놓쳤던 인텔…‘파운드리 부활’ 꿈도 물거품 되나 (1)
[딥다이브]
칩질라(Chipzilla)라는 말을 아시나요. 칩(반도체)+고질라의 결합어이죠. 고질라처럼 거대한 반도체 회사, 어디를 부르는 말일까요. 삼성전자? TSMC? 엔비디아? 바로 주인공은 ‘인텔(Intel)’입니다.
인텔.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회사이지만 이제 시가총액으론 엔비디아의 30분의 1, TSMC 8분의 1, 삼성전자의 4분의 1짜리 기업입니다. 한동안 부활의 시동을 거는 듯했었지만, 최근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악재뿐이죠. 56년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절을 겪고 있는데요. 오늘은반도체 거인 인텔의 추락을 들여다봅니다.
인텔의 부활이라는 그 화려했던 청사진. 그 후 3년. AP 뉴시스
◇ 창사 이래 가장 큰 위기
2분기 실적은 재앙에 가까웠습니다(16억 달러 손실). 이후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했고요(직원의 최대 15% 해고). 핵심 임원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났고(반도체 전문가 립부탄의 이사 사임), 고객사와의 협력은 불발됐습니다(소프트뱅크와의 AI칩 생산 논의 결렬). 주가는 불과 두 달 만에 반토막 나면서, 10여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 이달 중순엔 추가 구조조정 계획이 또 발표될 계획이라고 하죠. 자율주행 자회사 모빌아이와 일부 사업부도 내다 팔 거란 관측이 나옵니다. 심지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지만 파운드리 사업부 분할 가능성까지 제기되죠. 정말 어떻게 이렇게 최악일까 싶을 정도로 지금 인텔엔 악재가 가득합니다.
3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인텔 위기설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2021년 2월 인텔의 베테랑 엔지니어 팻 겔싱어가 12년 만에 새 CEO로 돌아오며 변혁을 약속했었죠. 차세대 제조설비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의 강자로 재탄생하겠다는 상당히 파격적인 계획이었습니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명실상부한 2위 자리에 올라 ‘TSMC의 대안’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 게 목표였습니다(지금도 인텔 내부 매출까지 합치면 삼성전자를 제치고 2위라고 주장 중).
인텔은 반도체 설계부터 제조까지 다 하는 ‘통합장치제조업체(IDM)’입니다.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의 가장 큰 고객은 인텔이죠. 그런데 앞으론 엔비디아도, 애플도 반도체 생산을 인텔 파운드리에 맡기게 만들겠다는 게 겔싱어 CEO가 내세운 청사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은 ‘인텔이 돌아왔다(Intel is back)’며 환호했고요.
미국 정부 역시 2022년 반도체 육성법을 통해 밀어줬습니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반도체 기업 중 가장 많은 지원금(85억 달러 보조금 +110억 달러 대출)을 받는 건 (당연히) 인텔이니까요.
2022년 9월 인텔의 오하이오 공장 건설 현장에서 연설하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 인텔은 현재 애리조나, 뉴멕시코, 오하이오, 오리건에서 공장 건설을 진행 중이다. AP 뉴시스
그동안 인텔은 최신의 최고급 장비(ASML의 하이(High) NA EUV)를 세계 최초로 들여와오리건 공장을 업그레이드했고요. 오하이오, 애리조나주에도 새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또 경쟁사도 못 한 1나노미터(㎚)대 초미세공정인 18A(1.8㎚) 공정을 개발해, 내년에 양산에 나선다는 계획입니다. 한마디로 최신 공정 개발과 제조역량 업그레이드에 무지막지한 투자비를 쏟아붓고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리고 내년이면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다는데. 왜 시장은 기다려주지 못하고 벌써 인텔이 끝난 것처럼 난리일까요. 막대한 투자비를 잡아먹는 인텔의 변혁 프로젝트가 사실상 도박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뒤처져 있는 제조역량을 끌어올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보는 거죠. 구세주인 줄 알았던 겔싱어 CEO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는 건데요.
과거 인텔은 한발 앞서가는 기술력으로 명망 높았던 회사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기술 혁신에 취약하고 시장 적응력이 떨어지는 조직으로 평가절하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찾으려면 먼저 20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합니다.
(동아일보 ‘딥다이브’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