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아이폰' 스마트폰 깨우다..옴니아·베가·옵티머스, 그리고 갤럭시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KT), 한국데이터통신(LGU+), 한국이동통신서비스(SKT)가 설립된 지 꼬박 4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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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10부. 아이폰 쇼크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KT), 한국데이터통신(LGU+), 한국이동통신서비스(SKT)가 설립된 지 꼬박 4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삼성전자, 스마트폰 'T옴니아' 공개 [사진=삼성전자]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2007년. 애플이 첫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글로벌 휴대폰 지형도가 크게 변했다. 손 안의 PC라 불린 스마트폰이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기존 휴대폰 업체들은 아이폰의 성공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애플은 휴대폰 시장에서는 꽤 뒤떨어진 후발주자였다. 후발주자의 단 한번의 맹공에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 셈이다. 아이폰의 기세를 꺾고,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전략폰 출시가 급선무였다.
3세대통신(3G)이 본격화됨에 따라 부상한 스마트폰은 이동통신 시장의 중심에 놓이게 됐다.
이통사의 주된 경쟁력은 곧 남보다 더 탁월한 단말을 공급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이에 따라 국내 업체뿐만 아니라 외산업체들의 공세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특히 3G에서 4G LTE로 이행되기 전까지 이통사와 제조사의 합종연횡이 계속됐다.
당시 스마트폰을 국내 공급한 제조사는 삼성전자와 LG전자, 팬택뿐만 아니라 SK텔레시스, KT테크, 아이리버, 애플, 소니, 레노버, HTC, 모토로라, 노키아, 리서치앤모션(현 블랙베리), 델, NEC카시오 등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삼성전자 울트라메시징 [사진=삼성전자]
◆ 스마트폰의 유래
스마트폰 명칭의 유래는 다양한 속설이 있으나 지난 1992년 퍼스널컴퓨터(PC)처럼 쓸 수 있는 전화기인 '사이먼'을 IBM이 발표하면서 쓴 바 있다. 국어사전에 '휴대전화에 여러 컴퓨터 지원 기능을 추가한 지능형 단말기'라고 정의내린 것으로 보아 거의 흡사하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일반 휴대폰과 PDA가 혼용돼 왔다. 당시 리서치인모션(RIM)이 두각을 나타냈다. 물리식 쿼티 자판과 자체적인 운영체제(OS)를 갖추고 있던 '블랙베리'는 스마트폰으로 불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국내서도 블랙베리와 흡사한 제품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가 지난 2006년 11월 14일 미국 이통사 싱귤러와이어리스(AT&T)를 통해 출시한 'HSDPA 스마트폰'을 꼽을 수 있다. 모델명 '블랙잭'으로 알려졌다. 국내는 '울트라메시징'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BBOS 대신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모바일 5.0 OS를 적용했다.
이를 발판으로 삼성전자는 '옴니아'를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전지전능'을 슬로건으로 초기 큰 인기를 끌었으나 추후 소비자들의 원성을 사면서 나락으로 빠진 바 있다.
LG전자는 심비안 OS를 탑재한 3G 스마트폰을 글로벌 시장에 출시했다. 대표 모델은 조이(LG-KS10)를 꼽을 수 있다. 구글과 제휴해 포털뿐만 아니라 구글맵과 G메일 등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2009년 2월 선보인 '인사이트'가 첫 스마트폰으로 분류된다. MS 윈도모바일 6.1 OS를 탑재해 인터넷플브라우징을 지원했다.
팬택도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지난 2008년 10월 미국 이통사 AT&T를 통해 MS 윈도모바일 기반의 듀얼 슬라이드폰 '팬택 듀오'를 꺼내들기도 했다.
외산 제조사의 경우 2008년 7월 2일 출시된 HTC '터치 듀얼'이 첫 사례로 꼽힌다. 같은해 12월 RIM 역시 블랙베리 볼드 9000을 출시했다. 애플 아이폰의 경우 2009년 11월 28일 도입됐다.
◆ ‘전지전능’ 옴니아 절망…슈퍼 갤럭시 ‘회생’
삼성전자의 카드가 '옴니아'였다. 옴니아의 위세는 대단했다. 삼성전자의 하드웨어 역량과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결합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말 그대로 '전지전능'을 꿈꿨다.
첫 옴니아는 2008년 11월 27일 SK텔레콤을 통해 출시됐다. 4GB 모델은 96만8천원, 16GB 모델은 106만8천100원이나 했다. 이후 옴니아HD, 옴니아2가 연달아 출시됐다. KT를 통해서는 쇼옴니아를, LG유플러스에서는 오즈옴니아가 판매됐다. 영국과 미국 지역에서는 옴니아7이라는 명칭으로 론칭됐다.
다만, 결과는 참혹했다. 미진한 생태계와 느린 속도, 각종 버그, 모바일에 익숙치 않은 PC UX 등에 발목이 잡혔다. 심하게는 망치로 옴니아를 깨부수는 영상이 돌기도 했다. 모든 것이 가능했지만, 모든 것이 잘 되지 않는 폰으로 전락했다.
시장조사업체 마케팅인사이트의 2010년 당시 설문조사를 살펴보면 옴니아2는 소비자만족도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특히 외관과 디자인, 키패드와 터치, OS, 인터넷, 앱 사용면에서 최저점을 받았다. 압도적인 1위는 아이폰이었다.
비록 옴니아의 실패를 통해 좌절을 맛봤지만 삼성전자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시련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은 끈기를 보여준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진행된 '애니콜 화형식'은 지금도 회자되는 사건이다. 애니콜 불량률이 치솟던 시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놈담이 아니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라"라고 말할만큼 품질혁신의 의지를 드러낸 때였다. 결국 이 화형식을 통해 삼성전자는 국내 점유율을 50% 이상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삼성전자는 옴니아 단종을 선언하고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체(OS)로 전략을 수정했다. 절치부심한 삼성전자는 새로운 스마트폰을 고안했다. 소량다품종이 아닌 삼성전자를 대표할 수 있는 브랜드로 '갤럭시'를 구축하고 최상위 모델인 '갤럭시S'를 공개했다.
삼성 갤럭시S 미디어데이 [사진=최규한 기자]
삼성전자 갤럭시S가 첫 공개된 시기는 2010년 3월 23일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ITA2010에서 첫 선보였다. 아이폰 대항마로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국내는 3개월 후인 6월 24일 SK텔레콤을 통해 출시됐다. 가격은 94만9300원으로 책정됐다. 신종균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과 SK텔레콤 하성민 대표, 구글의 앤디 루빈이 함께했다.
4인치 슈퍼 아몰레드 디스플레이와 9.9mm 얇은 두께, 1GHz 클럭속도의 삼성 모바일AP, 16GB 저장공간, 500만화소 오토포커스 후면 카메라 등 높은 하드웨어 성능을 갖췄다.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이 늘어남에 따라 활용폭이 더 넓어졌다.
삼성전자는 초도물량으로 5만대를 생산해 전국에 공급했다. 첫날 5시간만에 1만대가 동났다. 5일만에 10만 가입자를 돌파했다. 20만 가입자는 10일만에, 50만 가입자는 1개월만에 달성했다. 삼성전자의 호조로 SK텔레콤까지 덩달아 실적 향상을 이뤘다.
국내서는 이통사의 입김이 강했던 시기로 제조업체의 니즈보다는 이통사의 요구대로 스마트폰이 출시되는 시기였다. 갤럭시S는 SK텔레콤 전용폰으로 출시됐다. 타 이통사로눈 스펙을 소폭 낮춘 변종 모델로 판매됐다. LG유플러스로는 같은해 8월 19일 갤럭시U가 KT에서는 같은해 10월 11일 갤럭시K로 모습을 달리했다.
옴니아와는 달리 갤럭시S는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했다. 디자인부터 성능까지 많은 호평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 애플 아이폰에 대항할 수 있는 대표 제품이 부재한 상황에서 갤럭시S를 그 옆에 앉혀 반사효과를 누렸다.
갤럭시S는 다음해인 2011년 1월 1000만 대 돌파에 성공했다. 국내서는 200만대, 유럽에서 250만대, 북미에서 400만대, 기타 150만 대를 팔아치웠다. 그로부터 1년후인 2012년 1월 누적 판매량 2500만 대를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2011년 출시된 갤럭시S2가 갤럭시S의 대중화에 기여하면서 삼성전자는 휴대폰 강국인 노키아를 누르고 글로벌 휴대폰 시장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옴니아는 비록 단종됐지만 윈도폰은 추후 ‘아티브’라는 브랜드를 통해 재부활했다.
LG전자 안드로원 [사진=KT]
◆ 국내 첫 안드로이드 ‘LG전자’…팬택, 2위로 ‘성큼’
LG전자의 첫 스마트폰은 2009년 2월 이통3사를 통해 출시한 LG-SU200, '인사이트'라 불린 제품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모바일 6.1 운영체제(OS)를 적용했다. 다만 삼성전자가 윈도모바일 기반 '옴니아'로 참패를 겪으면서 LG전자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LG전자는 2010년 1월 다시 한번 윈도모바일 기반 스마트폰을 선보인다. 윈도CE5.2.2 OS 기반 LG-SU210, '레일라'폰이다. 꾹꾹 눌러 터치하는 감압식 패널을 갖춘 이 제품 역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LG전자가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도입한 때는 2010년 3월 10일로, KT를 통해 단독 출시된 '안드로원'이 꼽힌다. LG전자의 첫 안드로이드폰이다.
이후부터 LG전자는 대표 모델이라기보다는 시장 상황에 맞는 특화폰을 전략으로 내세웠다. 당시 이통사가 단말 유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여러 모델들을 이통3사에 맞게 산발적으로 출시했다. 삼성전자가 플래그십 모델인 '갤럭시S'를 내놓을 때도, 팬택이 '베가'를 정식 브랜드로 론칭했을 때도 LG전자는 의연했다.
예를 들어, LG전자는 2010년 6월 5일 슬라이드 물리식 쿼티 자판이 적용된 '옵티머스 Q'를 LG유플러스 단독으로 내놨다. 가격은 무려 89만9천800원이었다. SK텔레콤과 KT에는 '옵티머스Z'를 별도 공급했다. 가격은 옵티머스 Q와 동일했다.
물론 LG전자도 이통3사 공용 모델을 내놓은 바 있다. 2010년 10월 4일 출시한 '옵티머스 원'이 그것. 국내에서는 출시 3주만에 20만대 판매를 돌파하며 LG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옵티머스 원은 2개월만에 세계 판매량 100만대 돌파, 3개월만에 200만대 판매량을 기록했다.
하지만 LG전자는 다시 과거로 회귀했다. LG유플러스를 통해 단독 모델인 '옵티머스 마하'를 출시하면서 특화폰 전략을 고수한 것. 2011년 1월 25일 SK텔레콤 단독 모델인 '옵티머스 2X'를, KT 단독모델로는 풍선보다 가볍다는 콘셉트의 '옵티머스 블랙'을, LG유플러스 단독 모델로는 밝기가 뛰어난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옵티머스 빅'을 공급했다.
게다가 같은해 무안경 3D 스마트폰인 '옵티머스 3D'를 SK텔레콤 단독으로, LG유플러스 단독으로 '옵티머스 Q2'를 내놨다. '옵티머스 EX'가 나온 때도 이 때였다.
나름 성과는 있었다. 옵티머스 2X는 세계 최초 듀얼코어 스마트폰이라는 기록을 갖게 됐고, 물리식 자판이 전무후무했던 국내 시장에 옵티머스 Q 후속작까지 내놨다. 옵티머스 3D 역시 트라이 모드를 적용한 이색적인 모델로 꼽힌다.
문제는 판매량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갤럭시S에 이어 갤럭시S2로 휴대폰 강자인 노키아를 눌렀고, 팬택도 국내 시장 2위에 올라 '베가 레이서'로 입지를 단단히 했다. 그간 LG전자는 계속해서 헛바퀴만 돌 뿐이었다.
팬택 안드로이드폰 '시리우스'
팬택의 첫 스마트폰은 2010년 5월 SK텔레콤을 통해 출시한 '시리우스'다. 구글 안드로이드 기반의 3.7인치 OLED 디스플레이를 장착했다. 팬택 역시 이통사별로 다른 변종모델을 출시했는데, KT에서는 '이자르'를 LG유플러스에는 '미라크'를 내놨다.
2010년 7월 30일 팬택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베가'가 출시됐다. SK텔레콤을 통해 단독으로 출시됐다. KT와 LG유플러스에서는 '베가 Xpress'라는 이름으로 판매됐다.
이통사별로 다른 전략 모델을 선보인 팬택은 2011년 6월 10일 '베가 레이서'를 출시하면서 전략을 바꿨다.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이통사 동일 모델을 내놓은 것. 광고모델로 배우 이병헌을 내세우고 콘서트를 포함해 스포츠카인 페라리까지 경품으로 내세웠다. 베가 레이서는 누적 판매량 180만대를 달성하면서 국내 스마트폰 2위 자리에 팬택을 올려놨다.
SK텔레콤, 모토로이 공식 출시 모습 [사진=SK텔레콤]
◆ 이통사 자회사 도전…무덤에 뛰어든 외산폰
3G 시절 이통사는 자회사를 통해 자체적으로 단말을 공급하기도 했다. 다만 LTE 시대에 진입하면서 하나둘씩 사업 철수가 이뤄졌다.
SK텔레시스는 일명 '조인성폰'으로 불리는 '윈'을 내세웠다. 2011년 '윈2'까지 출시됐지만 이후 유명을 달리했다. KT는 '테이크' 브랜드로 국내 시장을 공략했다. 야누스, 타키, HD, 핏까지 KT를 통해 단독으로 여러 모델을 내놨지만 2012년 6월 17일 '테이크 LTE'를 끝으로 철수했다.
2010년 당시 무려 5인치 화면 크기의 스마트폰인 '스트릭'을 내놓은 델은 이후 소식이 묘연했다. 리서치인모션(RIM)은 2008년 12월 블랙베리 볼드 9000으로 국내시장 문을 두드린 이후 2011년 9월 19일 블랙베리 볼드 9900까지 공격적인 면모를 이어갔으나 끝내 좌절했다.
심비안 OS를 밀던 과거 휴대폰 왕국 노키아는 익스프레스 뮤직과 컴위드뮤직X6에 이어 마이크로소프트의 야심작 망고 등을 등에 업은 '루미아710'까지 내놨으나 무덤 속을 나오지는 못했다.
국내 첫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출시한 모토로라는 SK텔레콤을 통해 '모토로이'를 선보인 이후 2011년 11월 '레이저'까지 숨가쁘게 달려왔으나 다음 모델부터는 이통사를 통해 찾을 수 없게 됐다.
국내 첫 LTE 스마트폰을 공개한 HTC는 그나마 외산업체들 중 눈에 띄는 행보를 이어갔으나 2011년 12월 15일 '센세이션 XL'를 끝으로 한국지사를 철수시켰다.
소니(당시 소니에릭슨)는 2009년 3월 25일 SK텔레콤을 통해 '엑스페리아X1'을 선보인 이후 2011년 10월 7일 '엑스페리아 레이'까지 국내 시장 문을 두드렸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목차
1편. 삐삐·카폰 이동통신을 깨우다
2편. 1세대 통신(1G)
3편. 제2이동통신사 大戰
4편.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5편. 이동통신 춘추전국시대 개막
6편. 이동통신 혼돈의 세기말
7편. 3세대 이동통신(IMT-2000)
8편. 3G 시대 개막
9편. 3G 삼국정립
10편. 아이폰 쇼크
/김문기 기자([email protected])